부산교구 교구장 주교 성품 11주년 설교문
2월 14일(화) / 1고린 15:42-51 / 요한 6:60-71
프쉬케의 몸에서 프뉴마의 몸으로
(쏘마 프쉬콘에서 쏘마 프뉴마티콘으로)
반환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보, 마라톤 경기에서 선수들이 돌아오는 지점입니다. 가끔 자전거를 탈 때, 어느 지점을 반환점으로 미리 염두해두고 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가끔은 집에서 출발해서 영도 한 바퀴 돌아올 때도 있긴 합니다.
오늘 11주년을 맞으며, 얼마 전부터 드는 생각이 이제 반환점을 돌았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피니시 라인이지 하는 느낌도 듭니다.
이젠 한 해 한 해가 의미이다, 정년 5년을 염두에 두지 말고 그 해 그 해 최선으로 살면 되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인쇄물로 11주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두 가지를 꼽으라면, 4)와 10)입니다. 아는 것을 설교하지 말고 깨달아진 것을 설교하라. 전체는 부분을, 부분은 전체를 염두에 두어 하나인 교회를 이루라.
지난해에 저에게 깊이 들어온 말씀을 오늘 전례 독서로 정했습니다. 톰 라이트 주교님이 마커스 보그와 유명한 예수 논쟁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을 설명했습니다. 저로서는 매우 신선한 충격과 도전이었습니다. 이 내용입니다.
’44절,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아시듯이 이 본문은 사도 바울로께서 몸의 부활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다른 한글 번역은 자연의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본성에 속한 몸이 있으면 영에 속한 몸이 있습니다. 육체와 영을 대비하고 있다고, 너무나 당연한, 익숙한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은 프시케의 몸과 프뉴마의 몸으로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영, 프뉴마의 대비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 프시케라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던 것이 전도된 기분이었고, 제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만해도 프시케적인 것, 정신적인 것에 안도하기도 하고, 많은 의미도 주고, 때때로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프시케 차원에서 안주하지 말고 프뉴마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가 그렇고, 우리의 기도가 그렇고, 우리의 가르침이 그러해야 합니다.
’46절,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한 분석들이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단절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저마다 손 안의 인터넷으로 수시로 전 세계와 연결이 되고 소통이 되는데 무슨 단절의 시대? 하실 것입니다. 인터넷으로는 연결, 소통을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정보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듯, 사람은 정보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영의 존재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 처지와 비슷한 대목이 있어서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못마땅해 합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떠나가고 냉담하고, 설교에 대하여 불만족해 하고, 교회를 버리고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엊그제 기장교회에는 신자가 한 명 나왔습니다. 우리교구는 지난 해의 보고자료를 분석해보니까, 코로나19 이전보다 주일평균 출석수는 25% 감소, 예산은 10% 감소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67절, 자,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소? 당신들도 떠나갈 것인가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답변에 우리교구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성직은 성사의 봉사자 넘어 말씀의 봉사자입니다. 남들이 예수님을 떠나가고, 교회를 떠나가도 예수님 곁에 남아 그 분명한 이유를 대는 제자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 레마’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럴 수 밖에 없는게요, 사람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추구합니다. 현재 투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으로 고통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투르키에는 6.25 전쟁 때, 연합군으로 와서 우리를 도왔습니다.
무너진 건물잔해에 깔린 어린 딸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잡고 있는 어느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갈망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최고의 갈망은 삶, 생명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렇다면 나무가 살려고 물을 향해 뿌리를 뻗어가듯이 사람도 생명을 향해 영의 여행을 합니다.
’63절,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로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레마)은 영이요, 생명이다.’
로고스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그 말씀, 레마가 바로 영이며, 영인 그 깨달음의 말씀이 생명입니다.
아는 것을 설교하지 말고 깨달아진 것은 설교해야 하는 이유, 목적이 이것입니다. 사람은 생명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정신적인, 지적인, 프시케 차원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프뉴마 차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듯이, 사람이 떠나지 않습니다.
가을 전어는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지요? 깨달아진 말씀, 살리는 영인 깨달아진 말씀, 예수님의 레마 말씀은 교회 떠나간 신자들도 돌아오게 합니다. 이 뿐 아니라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립니다.
결국 이렇게 살아난 생명이 추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요, 하느님의 나라의 실체인 공의, 평화, 기쁨을 경험하도록 합니다.